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그네시아 전투 (문단 편집) ==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의 경과 및 의의 == [[파일:터키 갈라티아 4.png|width=760]] 기원전 188년 아파메아 평화협정으로 로마의 동맹인 페르가몬 왕국, 로도스를 중심으로 재편된 아나톨리아 반도 군사적으로 마그네시아 전투는 [[가우가멜라 전투]], [[비수대전]]과 함께 무능한 총사령관과 막장 지휘체계가 우월한 전력을 어떻게 말아먹을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라피아 전투]]에서 이 마그네시아 전투와 거의 비슷한 실책을 보여주며 패배한 바 있었다. 그때 한 번의 실수는 병력을 어떻게든 재건하여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만회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실수 후에는 답이 없었다.''' 여유롭게 승리를 거둔 로마군은 우선 셀레우코스 왕조와 휴전을 맺은 뒤 느긋하게 갈라티아를 공략했다.[*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기원전 189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로부터 군단들을 인수한 뒤 장병들을 사열하고 집합시킨 후에 한 연설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을 종결시킨 단 한 번의 전투에서 그들이 발휘한 무용을 칭찬했으며, 이젠 새로운 전쟁, 즉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갈리아인들은 안티오코스를 군사적으로 도왔으며, 선천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아 그들의 세력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안티오코스를 타우로스 산맥 저너머 시리아로 물러나게 한 일도 헛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출처: 《리비우스 로마사》 4권/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번역/ 현대지성/ 502~503쪽] 로마가 당시에는 당장 병합을 시도하지 않았으므로[* 아나톨리아 반도 일대의 직할령화는 상당히 오래 걸렸다. 직할령이 아나톨리아에 생긴 것 자체가 페르가몬 왕의 유증으로, 이 전투 시점에서 50년은 뒤인 기원전 133년부터였으며, 이탈리아 반도에서 먼 중동부 내륙 지역은 기원후는 되어서야 직할령이 되었다. 심지어 동부의, 아나톨리아라고만은 볼 수 없고 경우에 따라 아르메니아나 메소포타미아라고도 볼 수 있는 곳들은 기원후 3세기 초까지도 확실한 직할령이 아니었던 곳이 있었다. '''즉 확실한 직할령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독립국가는 더더욱 아니었던 소위 [[종속 지역]] 상태였던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 [[아나톨리아]] 각지의 군소 세력들도 셀레우코스 제국을 버리고 로마쪽으로 줄을 바꿔 잡았다. 전후 처리는 BC 188년 아파메아 협정을 통해 이뤄졌는데, 안티오코스 3세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아나톨리아의 주요 영토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마그네시아 전투 이전에는 양국의 경계가 에게 해였지만, 패전의 결과 양국의 경계는 타우루스 산맥이 되어 버렸다. 막대한 배상금을 감당하지 못한 안티오코스 3세는 토착 신전의 재물들까지 탈탈 털어갔는데, 이는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민심이 더욱 나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대규모 전쟁으로 고갈되어 가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사적 자산은 이 전투의 패배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었으며, 특히 전투 코끼리 군단은 이때 아예 해체되어 버렸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투 코끼리를 두려워한 로마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맺은 아파메아 평화조약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에 앞으로 두 번 다시 전투 코끼리 부대를 넣지 말고, 영원히 해체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BC 210년의 대규모 동방 원정으로 형식적인 복종을 받아냈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박트리아]] 등도 모두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다만 아르메니아는 눈치를 봐서 조용히 있었다.] 그후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의 노력으로 제국을 어느 정도 부활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놈의 내전과 권력 다툼 때문에 제국의 마지막 명군(이 될 뻔했던) [[안티오코스 7세]]때 메디아까지의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더불어 로마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 한니발 바르카의 신병 양도를 요구했던지라 한니발은 도주하여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한니발의 음독 자살은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기원전 183년 또는 181년의 일이었다. 한편 소아시아 중앙의 갈라티아 지역에 정착했던 [[켈트]] 계통의 민족인 갈라티아인들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도와 군대를 보내 참전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서는 그 이유가 갈라티아인들이 로마를 증오했고, 따라서 로마와 싸우던 [[안티오코스 3세]]를 도우려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 이유로 마그네시아 전투가 끝난 후, 로마의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만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에서 했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안티오코스의 군대에 [[갈리아]] 군단들이[* 갈라티아에 정착한 갈라티아인들이 원래 [[갈리아]] 지역에서 동쪽으로 떠난 자들이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갈라티아인들을 갈리아인들과 동일시했다.] 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전열 양쪽 날개에 배치된 것을 보았으며, 그들이 최선을 다해 안티오코스를 도왔고, 또 (그리하여 나는) 그들을 적법한 적으로 간주하고 싸웠으며, 그에 따라 그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 >《리비우스 로마사》 4권/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번역/ 현대지성/ 559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